477 - Night Skyline - New York
Still Life
韋相學 S. Wee (1913-1967)
Korea
대한민국 국전 10회 11회 특선 작가
대한민국 국전 10회 11회 특선 작가
Oil Painting on Canvas
48" x 24"
Lower Right
Original Frame
$30,000
국전 특선을 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가
LA한인미협(KAASC)초대회장을 지냈으나 자결로 생을 마감
대한민국 목우회 회원
위상학
斷崖 김광섭
나에게는 대한민국 국전에서 두 번이나 특선을 한
화가 韋相學의 오래 된 그림 두 점이 있다
그 중 볼 때마다 고향집 텃밭 같고 어머니 같은
정물화 소품 하나가 거실 책장 사이에 걸려 있어
틈 날 때마다 일기예보를 보듯이 보는 것이다
황토색 바탕 위에 뭉툭한 호미 하나와
산 자락 비탈밭에서 이제 막 캐낸 감자 하나
정갈한 짚세기 신발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1963년 작이니 아마도 화가가 渡美한 직후
고향을 그리며 그렸던 사실화 중 하나일 게다
美國 西部地域 基督敎指導者會의 초청을 받고
1963년 2월 8일 하오 3시 30분
聖畵를 그리러 미국으로 떠나 온지 오 년이 지났는데도
화가의 삶은 나아지는 법이 없었다
그나마 밥벌이를 하던 시원찮은 직장마저 잃어버리고
대한민국 국전 11회 특선 작품은 빚에 잡혀 빼앗기고 말았다
어떤 한국인에게 초상화 값을 받으러 갔다가
반값밖에 받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했다고도 한다
목사 직분은 신청하기 무섭게 나온다는 영주권마저
가난한 예술가에게는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언어장벽과 기약할 수 없는 가족과의 이별,
수면제로 이어지는 궁한 날들을 견딜 수가 없어
마침내 1967년 3월 29일 새벽
로샌절러스의 싸구려 아파트 단칸방에서
화가 韋相學씨(55)가 할복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을 두고도 분분한 말들이 많았다, 누구는
미국에서 저명한 화가가 되지 못한 것을 비관했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오지 못한 것을
책망하며 불안해했다고도 하고
抽象으로 바뀐 그림들이 신통치 않아서였다고도 하지만
일생에 스스로 만족할 만한 그림,
서너 점만 그리고 죽고 싶었다는 화가는
그림이 가난의 원인이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위상학(韋相學)
[自虐畵家(자학화가)] – 自殺(자살)한 위상학(韋相學)씨의 生活周邊(생활주변)
경향신문 / 1967.04.24 기사(뉴스)
[自虐畵家(자학화가)]
自殺(자살)한 위상학(韋相學)씨의 生活周邊(생활주변)
입버릇처럼 <아… 죽어야하겠다>
<抽象(추상)으로 바꿨으나 신통찮아
시원치않은 職場(직장)마저 잃어버려
夫人(부인)으로부터 못살겠다는 편지>
<로샌절러스>에서 黃圭泰通信員(황규태통신원)
지난 3월 29일 새벽 화가 위상학(韋相學)씨(55)가 <로샌절러스>의 싸구려 어파트 단간방에서 할복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평소 보통이상으로 사람들을 회피해왔으며 매일처럼 만족한 그림 서너점만 그리고 죽어야겠다고 입버릇같이 말해왔다. 그가 왜 자살하지 않으면 안되었나를 그의 美國(미국)에서의 생활을 보면 수긍이 가는 점이 많다.
5년 전에 美國(미국)으로 건너온 위(韋)씨는 아직도 생활기반을 갖지 못했으며 자살하기 며칠 전에는 시원치 않은 직장마저 잃었다.
영주권을 신청했으나 좌절당하고 韓國(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데려올 길은 막연했고 더욱 언어장벽은 그의 美國(미국)사회와의 인연을 갈라놓았다.
수면제 없이는 심한 불면증을 달랠 수도 없었고 차차 마음이 비뚤어져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그를 받아줄 만한 직장도 나서지 않았다.
위(韋)씨는 캠퍼스 앞에 붓을 들고도 韓國(한국)에 있는 가족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림에 붓을 던지고 화폭을 찢곤 했다.
그는 寫實(사실)화풍의 그림을 美國(미국)에 와서부터는 抽象(추상)으로 바꾸어왔다. 그러면서도 추상은 자기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친구들을 만나면 호소하곤 했지만 궁한 자기생활은 입밖에 내지도 않았다. 그는 韓國(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불규칙하게나마 송금해오던 것도 보내지 못하고 있던 중 부인으로부터 “더 이상 못살겠으니-“라는 심한 편지가 온 후로는 꼭 죽어야겠다고 말하여왔다.
韓國國展(한국국전) 11회 때 특선했던 작품을 빚에 잡혀 빼앗겼고 어떤 韓國(한국)인에게 초상화 값을 받으러 갔다가 그림이 잘되지 못했다고 반값밖에 받지 못하고 초상화가 걸려있던 벽에는 값싼 풍경화가 바뀌어 걸려있었다. 이런 모욕을 받을 때마다 죽음에의 유혹은 짙어만 갔다.
그는 친구들을 만나면 韓國(한국)의 자기 가족이 다 자살한 모양인데 알면서도 자기에겐 소식을 전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었다. 자살하기 하루 전 <로샌절러스> 韓人美協展(한인미협전)에 내걸었던 작품 7점을 모두 찢어버리고 유언도 없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韓國(한국)에는 유족으로 부인 韓永信(한영신)씨와 1남3녀가 있다.
위(韋)씨는 日本(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수료하고 목우회 회원, <로샌절러스> 한인미협초대회장, 한국미협회원, 한국국전 10회, 11회에 특선을 한 바 있다.
위(韋)씨는 日本(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수료하고 목우회 회원, <로샌절러스> 한인미협초대회장, 한국미협회원, 한국국전 10회, 11회에 특선을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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